두산은 세대교체의 강한 파도를 맞고 있다. 3루수 허경민이 이적했고, 유격수 김재호가 은퇴했다. 내야 절반이 무주공산이다. 시험해 볼 젊은 자원들은 많지만, 툭 튀어나오는 얼굴은 아직 없다.
올 시즌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양석환(33)은 그래서 매일 같이 후배들에게 말한다. “내야 왼쪽(유격수, 3루수 자리)에 100억이 깔려 있는데 왜 눈에 불을 켜고 그 돈 벌려고 안 하느냐”는 것이다. 기회는 충분하고, 야구만 잘하면 되니까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보라는 이야기다.
프로 선수들에게 ‘FA 대박’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사실 많지 않다. 다름 아닌 양석환이기에 더 와닿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양석환은 LG 시절만 해도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두산 이적 후 장타 잠재력을 터뜨리며 리그를 대표하는 ‘잠실 거포’로 떠올랐다. 매년 20개 이상 홈런을 때리면서 지난해 두산과 ‘4+2년’ 78억원에 잔류 계약까지 맺었다.
양석환은 “겪어본 사람의 얘기니까, 후배 선수들도 꼭 좀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자기 위치는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후배들이 더 성장해야 팀 두산도 더 강해진다. 늘 목표로 했던 30홈런까지 달성했으니 남은 개인 성적 욕심도 없다. 이제는 무조건 우승이다. 양석환은 “올해처럼 이 선수 잠깐, 저 선수 잠깐 그렇게 돌아가는 식으로 좋은 성적을 내기는 힘들 것 같다. 후배 중 누군가는 꼭 자리를 잡아주면 좋겠다. 그게 돼야 우리 팀도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양석환은 재계약 첫해인 올 시즌 34홈런에 107타점을 기록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30홈런-100타점을 넘겼다.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 한 시즌 30홈런을 때린 국내 선수는 양석환을 포함해 역대 불과 5명뿐이다. 타율 0.246이라는 숫자는 아쉽지만 거기에 연연하지는 않으려 한다. 양석환은 “타율이 낮아 굉장히 질타도 많이 받았지만, 사실 내가 수험생으로 치면 모든 과목에서 100점을 받는 학생은 아니지 않으냐”며 “타율을 좀 더 올리면 좋겠지만, 내가 가진 강점을 확실히 살리고, 내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프로 초년생부터 해왔던 오랜 생각이다. 그와 같은 확실한 방향성이 없었다면 프로 통산 156홈런을 때린 지금의 양석환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엽 감독이 새로 부임한 지난해, 그는 현역 시절 밀어서도 홈런을 펑펑 때렸던 이 감독에게 밀어치기 비결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마다 맞는 옷이 따로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양석환은 “이영수 코치님이나 다른 코치님들과도 얘기를 많이 나눠봤다. 나는 바깥쪽 공도 당겨서 홈런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인데 왜 굳이 그걸 밀어서 힘없는 라이트 플라이를 만들어야 하나 싶더라”며 “팀에서도 내게 원하는 건 당겨서 홈런을 때리는 거니까, 그런 장점을 확실히 살려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원래도 했던 생각인데 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양석환은 프로에서 156홈런을 때렸지만, 오른쪽 담장을 넘긴 건 단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풀 히터(pull hitter·잡아당기는 타자)’다. 이른바 ‘부챗살 타격’이 타격의 이상향으로 종종 거론되곤 하지만, 양석환은 누구보다 자기 스타일에 확신과 자신감이 있다. 양석환은 “은퇴할 때까지 밀어서 홈런 1개도 없는 게 내 목표”라고 했다. 그저 농담만은 아닌 얘기다.
양석환은 최근 주장 완장을 팀 선배 양의지에게 넘겼다. 이승엽 감독이 시즌 내내 여러 차례 ‘역시 양석환’이라며 칭찬할 만큼 주장으로 제 역할을 다 했으니 미련은 없다. 그저 아쉽다면 꼭 우승팀 주장을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다는 것이다.
내년 시즌 우승하면 주장일 때 하지 못한 게 혹시 생각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양석환은 “생각만 해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그럴 틈이 있겠느냐”고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