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오타니 쇼헤이(30·LA 다저스)는 메이저리그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최근 떠오르는 다른 아이콘들과는 결이 조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브라이스 하퍼(필라델피아), 후안 소토(뉴욕 양키스),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샌디에이고),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토론토) 등 신세대 스타들은 자신의 감정 표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타니는 조금 다르다. 이른바 '모범생' 이미지다.
오타니는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세리머니를 해도 가벼운 게 일반적이었다.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 당시 일본의 마무리 투수로 나와 결승전에서 마이크 트라웃을 헛스윙 삼진으로 처리한 뒤 포효했던 장면에 대해 미국의 많은 팬들이 놀라움을 드러냈을 정도였다. 평소 리그 경기에서는 저 정도의 액션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규시즌에 다시 들어온 오타니는 다시 평소의 얌전한 이미지로 돌아왔다.
올 시즌 LA 다저스로 이적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메이저리그 7년 차를 맞이하는 오타니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어쩌면 메이저리그의 올드팬들이 사랑하는 '모범생'의 바른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올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소경기 40-40, 그리고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첫 50-50을 달성했을 때도 세리머니는 있었지만 엄청난 화제를 모으지는 않았다. 40-40 달성시는 팀을 승리로 이끄는 끝내기 홈런이어서 조금 더 회자됐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오타니의 액션이 유독 커지고 있다. 그리고 발언 또한 자신감을 더해가고 있다. 2018년 시즌을 앞두고 LA 에인절스와 계약하며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오타니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에인절스의 전력에 구멍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반까지는 잘 달리다 후반 들어 고꾸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오타니는 지속 가능한 강팀이자, 매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10년 총액 7억 달러라는 거액도 거액이지만, 이중 6억8000만 달러를 지불 유예로 처리한 것은 결국 오타니가 돈보다는 명예와 상징, 그리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상징한다.
다저스는 올해 내셔널리그 1번 시드를 차지했고, 정규시즌 50-50 대업을 달성한 오타니도 이 포스트시즌을 손꼽아 기다렸다.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된 이후에는 클럽하우스에서 열린 팀 축하연에서 평소 입에도 대지 않던 샴페인을 한 잔 들이키기도 할 정도로 기쁨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말 그대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다. 평소 오타니가 맞나 싶을 정도의 액션들이 자주 나온다.
최근 숙적으로 떠오른 샌디에이고와 디비전시리즈 1차전부터 그랬다. 오타니는 0-3으로 뒤진 상황에서 두 번째 타석에 나서 샌디에이고 선발 딜런 시즈를 상대로 동점 3점 홈런을 터뜨렸다. 모두가 기다린 오타니의 포스트시즌 첫 홈런이었다. 사실 디비전시리즈 전체를 승리로 이끄는 끝내기 홈런도 아니었고, 이제 막 시리즈를 시작하는 경기의 초반 동점 홈런이었다. 그런데도 오타니는 배트를 냅다 던져버리며 포효했다.
좌타자인 오타니는 배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뒤로 세게 던져버렸다. 다저스타디움은 홈팀 다저스가 3루 더그아웃, 원정팀이 1루 더그아웃을 쓴다. 좌타자가 뒤로 던진 배트라 샌디에이고 더그아웃 앞으로 굴러 들어갔다. 아무리 요즘 메이저리그의 불문율이 완화되는 추세라고 해도 샌디에이고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모범생이었던 오타니가 그런 배트플립을 하고 1루를 돌면서 마치 50번째 홈런을 친 것처럼 포효했다. 이것저것을 다 생각하는 평소 오타니의 성품이라면 그 정도 배트플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포스트시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타니는 2차전과 3차전에서는 다소 부진했다. 팀도 시리즈 전적 1승2패에 몰리며 탈락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오타니는 3차전 이후 순차적으로 진행된 미국과 일본 언론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오타니는 "이제 간단해졌다. 2연승을 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1승2패에 몰린 상황이지만 겸손보다는 투지와 자신감을 대변했다. 평소 말 한 마디에 신중한 오타니의 화법과는 또 다르다는 평가가 나왔다.
10일(한국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디비전시리즈 4차전에서는 전투력이 더 올라갔다. 이날 다저스는 여러모로 위기였다. 2승1패로 앞선 샌디에이고는 4차전 선발로 1차전 선발이었던 딜런 시즈를 내는 강수를 썼다. 시리즈를 여기서 끝내겠다는 각오였다. 반대로 다저스는 이렇다 할 선발 투수가 없었다. 랜던 낵 정도가 벌크가이로 대기하고, 나머지는 불펜 투수들로 싸워야 했다. 투수 교체에 조금의 오차가 있으면 안 되는 굉장한 고난이도의 작업이었다. 여기에 팀의 핵심 타자인 프레디 프리먼은 오른 발목 부상으로, 팀의 주전 유격수로 뛰던 미겔 로하스는 내전근 부상으로 아예 선발에서 빠졌다.
이에 다저스는 이날 오타니 쇼헤이(지명타자)-무키 베츠(우익수)-테오스카 에르난데스(좌익수)-맥스 먼시(1루수)-윌 스미스(포수)-토미 에드먼(유격수)-개빈 럭스(2루수)-키케 에르난데스(3루수)-크리스 테일러(중견수) 순으로 타순을 짰다. 리드오프로 나서는 오타니, 그리고 3차전에서 홈런을 치며 포스트시즌 침묵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베츠의 몫이 중요한 날이었다.
베츠가 1회 시작부터 홈런을 치며 기선을 제압했고, 추가점은 오타니가 책임졌다. 다저스는 1사 후 개빈 럭스가 볼넷을 골랐고, 이어 키케 에르난데스가 중전 안타를 치며 1사 1,3루를 만들었다. 크리스 테일러가 삼진으로 물러나 흐름이 끊기는 듯했으나 여기서 오타니 쇼헤이의 방망이가 빛났다. 오타니는 시즈의 초구 바깥쪽 스위퍼를 노렸다는 듯이 잡아당겨 1·2루간을 빼는 우전 적시타를 터뜨렸다. 장타는 아니었지만 2사 후 추가점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오타니는 적시타를 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면서 1루로 달려 나갔다. 스스로도 이미 감정이 몸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더 이례적인 장면은 5-0으로 앞선 4회였다.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오타니는 볼넷을 골랐고, 베츠의 중견수 뜬공 때 2루에 들어갔다. 샌디에이고도 오타니가 1루에서 2루로 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긴 다리로 성큼성큼 2루를 향해 뛰어 들어간 오타니의 발이 더 빨랐다. 오타니는 이어진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의 타구 때 3루로 갔다.
사실 3루수를 지나 좌익선상으로 빠지는 공이었다. 샌디에이고 3루수 매니 마차도의 글러브 반경을 벗어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라인선상에서 타구를 판정하던 3루심의 손에 맞았다. 3루심도 고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페어를 선언하다 공이 손에 와 맞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손에 맞은 공은 마차도 앞에 떨어졌다. 내야를 빠져 나갈 것으로 확신하고 3루 코치는 오타니에게 홈 대시를 지시했는데,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마차도가 다시 공을 잡아 홈으로 정확하게 던져 오타니는 홈에서 간발의 차이로 아웃됐다.
오타니도 분명 공이 빠진다고 생각했기에 예상보다 더 빨리 홈으로 온 타구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타구가 3루심에 손에 맞는 것은 보지 못했다. 오타니는 의아한 듯 더그아웃에서 전자장비를 통해 이 상황을 확인했고, 뒤늦게 3루심의 손에 타구가 맞아 자신이 아웃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오타니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라운드를 향해 소리를 쳤고, 아마도 3루심을 향한 것으로 보였다. 만약 그랬다면 오타니 인생에서 처음으로 심판을 향해 큰소리로 불만을 표한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곁에서 이를 보고 있던 동료들이 경기 후 이구동성으로 "놀랐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오타니의 전의는 타오르고 있다. 가을 공기는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의지를 다르게 한다. 오타니도 다르지 않다. 이미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쥔 오타니다. 올해는 결혼까지 했다. 이제 남은 건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목표다. 사실 기회가 매번 오지 않는다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서 6년간 포스트시즌을 본 오타니도 잘 안다. 최근 6년의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모두 달랐다. 계속 이기는 수밖에 없고, 샌디에이고라는 강적을 만난 오타니의 마음가짐도 남다르다. 그 의지가 5차전 승리, 챔피언십시리즈 진출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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