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언의 공연산책]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짧지만 눈부시게 타오른 조선의 태양

입력
2024.09.06 13:04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되지 못한 형제의 꿈과 미소"

경종,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좌를 지킨 조선의 20대 국왕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이름을 듣고 조선의 긴 역사 어딘가에 그런 왕이 있었겠거니 정도로 생각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희빈 장씨였다는 사실을 듣고 나면 혼란했을 그의 삶을 조금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랐고, 어머니의 죽음과 당파 간의 격렬한 다툼으로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도 굳건히 세자의 자리를 지켜 왕의 자리까지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경종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치 싸움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온갖 트라우마와 신경증적 증상이 찾아왔다.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경종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과의 우정과 성군이 되고 말리라는 우직한 다짐이었다. 어렸을 적 함께 꿈을 나누며 성장한 형제는 각각 왕과 왕세제의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고, 왕의 자리를 놓고 겨루어야 할 운명임을 깨닫는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조선의 태양을 꿈꾼 경종과 연잉군,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관 홍수찬의 이야기를 그린다.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짧지만 눈부시게 타오른 조선의 태양

조선의 왕이 된다는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절대 지존의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생명의 위협을 감당해야 하는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특히 호시탐탐 왕좌를 노리는 피붙이들의 시퍼런 칼날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권력에 눈이 먼 형제들의 세력 다툼은 그 역사가 깊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시작된 형제간의 피의 전쟁은 조선의 역사 전반을 지배해왔다. 조선의 왕들은 안 그래도 외로운 왕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형제조차 경계하고 내쳐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 그 운명에 정면으로 맞선 왕이 있었으니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경종이다.

연잉군은 희빈 장씨의 죄를 밀고해 죽음에 이르게 한 숙빈 최씨의 아들이었으며, 경종과는 대척점에 서 있던 노론파 권력의 중심이었다. 시기하고 미워하며 복수의 칼날을 겨눠도 시원치 않을 그를, 경종은 따스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그에게 연잉군은 배척해야 할 경쟁자가 아닌 함께 자라고 뛰놀며 우애를 다진 벗이자 형제였다. 작품은 경종과 연잉군의 깊은 관계를 서정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연잉군과 노론의 세력으로부터 왕위를 지켜야 하는 경종의 고뇌와 왕의 자리를 탐내는 연잉군의 욕망을 전개하면서도 두 인물이 함께 나눴던 추억과 꿈, 서로를 아끼는 마음 역시 세밀하게 파고든다. 성군이 되어 더 나은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경종과 연잉군의 소망은 결국 하나의 자리를 꿈꿨으므로 필연적인 비극을 맞았으나 이들의 진정한 우정은 남아 진한 감동을 안긴다.

상반된 감정 속에서 벌어지는 경종과 연잉군의 갈등, 두 개의 태양을 둘러싼 정세의 혼란을 담은 이야기는 역사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의 서사는 경종을 둘러싼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펼쳐지며, 가상의 인물인 홍수찬의 존재 등 몇몇 요소를 제외하고는 기록된 역사와 동일하게 흘러간다. 때문에 극의 전개가 조금은 더디게 느껴질 수 있으나, 천천히 쌓여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에 푹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이렇듯 다이나믹한 전개와 극적인 반전 같은 자극적인 요소보다는 잔잔하게, 그러나 긴장감 있게 묵묵히 끌고 가는 탄탄한 서사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보통 사극 뮤지컬 넘버 하면 동양적인 현악기 소리가 주를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의 경우는 다르다. 아련하고 서글픈 감성이 넘쳐흐르는 동양풍의 곡조보다는 빠른 박자감의 매끈한 피아노 선율이 주가 되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첼로와 기타의 라이브 연주가 더해져 완전한 정통 사극의 느낌보다는 퓨전 사극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세련된 멜로디가 의외로 작품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극에 생동감을 더한다. 작품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상당하기에 한층 가벼운 소리로 쿵, 쿵 리듬감 있게 울려오는 넘버들의 향연이 반가웠다. 사극의 묵직함은 유지하되 비교적 부드러운 넘버들이 부담감을 덜어주어 극의 밸런스를 잘 잡아낸다.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짧지만 눈부시게 타오른 조선의 태양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의 무대는 조선 왕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온 듯 웅장하고 수려하다. 무대를 휘감는 전통적인 한국의 미는 극적인 화려함과 대단한 무대장치 없이도 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의상의 비주얼이 돋보이는데, 붉은 비단에 반짝이는 금사가 수 놓인 곤룡포의 형상이 자아내는 위엄찬 분위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무대 배경부터 의상, 작은 소품들까지 만듦새가 탄탄하여 사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200%, 아니 그 이상으로 살려서 보여준다. 무대에서 생생히 펼쳐지는 역사의 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관객에게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가 되어줄 것이다.

사극이라는 장르를 훌륭히 소화해 낸 배우들의 뛰어난 면모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극의 여러 특성상 자칫 잘못하면 어색한 인상을 주기 십상임에도 세 배우 모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연기와 깔끔한 합으로 극을 부드럽게 이끌어나간다. 특히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민진 배우의 연기는 실제 역사 속 인물이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경종. 짧게, 그러나 눈부시게 빛을 냈던 그의 삶은 조선의 한가운데에 남아 은은히 역사의 한 귀퉁이를 밝힌다. 한기 가득 냉랭한 왕의 길을 걸으면서도 따스한 성군의 꿈을 잃지 않았던 경종의 마음이 오래도록 널리 전해지기를 바래본다. 한편,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대학로 TOM 1관에서 오는 11월 10일까지 공연된다. 일부 잔인한 묘사가 있고, 14세 이상 관람가이므로 예매시 주의를 요한다.

글, 강시언 문화칼럼니스트<저작권자 Copyright ⓒ MHNsports / MHN스포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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