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블랑 현대캐피탈 감독이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황승빈과 이준협, 둘 중 팀의 주전 세터로 누구를 낙점해야 할지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블랑 감독은 이들 가운데 어떤 이가 코트에 들어서든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준협은 어리다 보니 경기력을 항상 유지할 수는 없다. 경험 많은 황승빈이 이준협을 끌어주길 바란다. 두 세터가 함께 갔으면 한다"고 밝혔다.
현대캐피탈은 14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펼쳐진 '도드람 2024-2025 V-리그' 남자부 2라운드 방문경기에서 한국전력을 3-0(25-17, 30-28, 25-21)으로 제압했다.
1라운드를 1위로 마친 현대캐피탈은 이 승리로 2라운드의 문을 활짝 열었다. 승점 3을 추가해 총 17점을 낚았다. 6승1패로 단독 선두를 질주 중이다. 2위 대한항공(4승3패)과는 승점 3 차다.
이날 현대캐피탈은 반가운 얼굴이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현대캐피탈의 '마지막 퍼즐'이라 불린 세터 황승빈이다. 지난달 27일 대한항공과 1라운드 맞대결(3-2·현대캐피탈 승) 이후 18일 만의 스타팅 출격이었다.
오랜만에 밟은 코트였지만 황승빈의 기량은 여전했다. 오히려 전보다 한껏 자신감 있는 토스웍으로 팀을 이끌었다. 한국전력을 상대로 황승빈이 시도한 세트(토스)는 총 65개 중 39개가 득점으로 연결됐다. 성공률로 따지면 59.09%였다.
그간 황승빈이 웜업존을 지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리카드를 3-2로 이겼던 현대캐피탈의 시즌 첫 경기. 선발 출장했던 황승빈은 4세트 도중 블로킹 과정에서 얼굴에 공을 맞아 고통을 호소했다. 이로 인해 뇌진탕 증세를 보인 황승빈의 컨디션 회복을 위해 블랑 감독은 이후 이준협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1라운드를 소화했다. 그런데 '수련선수' 출신 이준협이 나서는 경기마다 기대 이상 활약을 펼친 덕에 황승빈 또한 무리하지 않고 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또 하나. 황승빈은 이번 시즌 개막 코앞에 두고 KB손해보험에서 현대캐피탈로 둥지를 옮겼다. 블랑 감독에 따르면 이적 직후 황승빈이 팀훈련에서 보여준 경기 운영 방식은 사령탑이 추구하는 방향과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블랑 감독은 황승빈이 팀의 주포인 레오와 허수봉에게 공을 몰아주기보다는 다양한 공격 선택지를 고민하길 바랐다. 블랑 감독은 이준협이 버티는 동안 황승빈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로 바꿔갔다.
그리고 때가 왔다. 블랑 감독은 한국전력전 사전 인터뷰에서 "황승빈의 몸 상태가 좋다. 황승빈은 프로 의식이 투철한 선수다. 팀훈련을 통해 공격수 전원과 콤비네이션을 맞춰 가고 있다. 뇌진탕 증세도 지금은 완벽히 회복했다"며 황승빈의 기용을 예고했다. 사령탑의 기대대로 황승빈은 팀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으로 경기를 조율했다. 허수봉이 20점, 레오가 14점을 기록했고 신펑과 최민호도 나란히 9점을 올렸다. 공격성공률 면에서도 허수봉(64.29%), 레오(48.00%), 최민호(75.00%), 신펑(66.67%) 모두 훌륭했다.
경기 후 블랑 감독은 "황승빈이 팀에 처음 왔을 때는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경향을 보였다. 허수봉과 레오에게만 공을 올렸다"면서 "(황승빈은) 오늘 김진영, 신펑, 정태준 등 다양한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황승빈) 스스로도 사이드 아웃을 돌리는 데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고 만족했다.
블랑 감독은 또 "(황승빈은) 트레이드 후 팀을 점점 이해해 나가고 있는 단계다. 오늘(14일) 승리했기 때문에 보다 확신을 갖고 다음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너무 오랜만에 경기를 뛰어서 긴장이 됐다"는 황승빈은 "밖에 있는 동안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훈련했다. 공격수들에게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작 내 손에서 공이 나가는 컨트롤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황승빈은 "감독님이 가장 많이 조언해주신 부분은 토스의 기술보다도 경기 운영에 대한 부분이다. 레오나 (허)수봉이에게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공을 올려줄 수 있고, 또 수봉이와 레오의 부담감을 낮추는 데 있어 어떻게 해서 신펑 쪽으로 속공 사인을 주면 좋을지에 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황승빈은 블랑 감독이 "개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팀에 입히려 하기보다는 우리의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쪽으로 팀 컬러를 만들어가는 느낌"이라면서 "(블랑 감독이) 기본기를 중요시한다"고 이야기했다.
개막 전 레오와 허수봉, 최민호 등이 포진한 현대캐피탈의 유일한 약점은 세터였다. 하지만 '마지막 퍼즐' 황승빈의 합류로 단숨에 대한항공의 통합 5연패를 저지할 대항마로 떠올랐다. 여기에 이준협도 황승빈과 치열한 주전 경쟁을 예고했다.
두 명의 세터와 함께 현대캐피탈은 거침없이 질주를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블랑 감독은 다음 경기에서도 황승빈과 이준협 중 누구를 먼저 코트에 올릴지 쉽사리 정하지 못할 듯하다. 행복한 고민이다.
현대캐피탈은 오는 19일 삼성화재를 상대한다. 15일 현재 삼성화재는 2승4패, 승점 8로 5위에 올라 있다.
사진_KO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