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일레븐)
김태석의 축구 한 잔
인도네시아축구협회(PSSI)가 신태용 감독을 갑작스럽게 경질한 후폭풍이 꽤나 거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신임 감독이 발표된 상황이라 신 감독 처지에서는 꽤나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이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한국 팬들의 분위기도 상당히 좋지 못하다. 소위 '뒤통수' 논란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다.
지난 11월 인도네시아의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C그룹 일본·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한 홈 2연전, 그리고 지난 12월 2024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 베트남 원정 경기를 현장에서 접했다. 이 세 경기를 전후로 현지 미디어들과 소통하고, 현지에서 직접 그들의 분위기를 접했을 때 경험을 전하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뭔가 이상한 시그널이 자꾸 감지가 됐었다.
▶ 문제는 중국 원정 경기부터
현재 FIFA 랭킹상 아시아 1위이자, 현재 유럽 팀과 맞대결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는 일본과 홈 경기를 앞둔 인도네시아의 분위기는 뭔가 묘했다. 제3자 시각에서 볼 때 C그룹 최약체라 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는 2무 2패, 나름 분투하는 상황이었다.
신 감독은 예선 레이스가 돌입된 후 4차 예선 진출, 그러니까 C그룹에서 4위 내에 들어 거기서 월드컵 본선행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데 현재 C그룹 순위표를 보면 알 수 있듯 해당 시점 순위 여부를 떠나 절대 절망감을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4라운드 중국 원정 경기 패배 이슈가 일본전을 앞두고 현지 미디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 신 감독은 3라운드 바레인 원정 경기 때와는 사뭇 다른 라인업을 들고 중국을 상대했다가 1-2로 패했었다. 바레인전에서 경기를 뛰지 못했던 아스나위 망쿠알람이 중국전에서 뛰고 샌디 월시가 선발에서 빠지는 등 변화가 감지되었는데 이를 두고 몇몇 인도네시아 미디어는 패배의 원인이라며 신 감독을 질타했다.
최근 A매치에서 굉장히 부진했던 중국이라 원정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여긴 듯한데 도리어 패배했으니 그 원인을 신 감독의 선수 변화에서 찾았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 미디어에서는 신 감독과 일부 귀화 국가대표 선수들과 트러블이 있었다는 근거 없는 말까지 나돌았다. 유럽 출신 감독이 유럽 출신 귀화 선수를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 시점부터다.
어쨌든 정말 중국전 승리를 자신했었던 듯하다. 물론 중국 원정에 앞서 바레인을 적지에서 거의 잡을 뻔했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인도네시아가 '언더독'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제3자 시각에서 아무리 인도네시아가 최근 진일보했어도 3차 예선 레벨에서는 어느 팀도 만만히 볼 수 없을 법한데도, 인도네시아는 중국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묘했던 일본전 전후 분위기, 신 감독을 괴롭혔을 두 가지 이슈
11월 인도네시아는 일본과 홈 경기에서 0-4로 대패했다. 애당초 각오하고 임한 경기였을 것이다. 일본은 6경기가 종료된 C그룹에서 22골을 넣고 2골만 내주며 5승 1무라는 압도적 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중국은 일본에 0-7로 졌고, 바레인은 홈에서 0-5로 대패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홈에서 힘도 못 쓰고 0-2로 졌다.
1-1로 비긴 호주전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은 어너더 클래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처지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결과긴 해도, 제3자 시각에서 0-4는 굉장히 합리적인 스코어였다. 초반 두 차례 결정적 찬스를 살렸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경기였지만, 누가 봐도 일본이 인도네시아보다 강한 팀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전 전후로 이상한 이슈가 또 나돌았다. 첫째는 귀화 국가대표인 엘리아노 라인더르스의 명단 배제다. 가뜩이나 중국전 이후 이상한 루머가 돌았기에 엘리아노가 벤치에도 못 앉았던 이 상황을 두고 말이 많았다. 일본전 패배 직후 기자회견에서도 해당 질문이 신 감독에게 날아들기도 했다.
엘리아노의 명단 배제와 관련해 현지 취재했을 때 신 감독은 귀화 국가대표 선수라도 팀 내 경쟁에서 이겨야 경기에 내보낼 수 있다는 기준을 선수에게 제시했다. 이는 엘리아노만 그런 게 아니다. 신 감독은 사실 10월 바레인전에 후반 시작과 함께 교체 투입하며 기회를 준 바 있었고, 엘리아노는 부족했다. 축구적 관점에서는 당연한 팀 운영 방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축구 외적 관점에서 볼 때 트집이 잡힐 만한 요소가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한 현지 기자는 이와 관련해 특별 귀화 절차에 힘을 쓴 '윗선의 체면'을 언급했다. 특히 6월 이후 인도네시아의 귀화 국가대표 선수 숫자가 갑자기 폭증을 하는데, 까다로운 귀화 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인도네시아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것에는 인도네시아축구협회나 정부 차원에서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 감독이 이를 의식하지 않고 선발 기준을 내세우고 선수 길들이기를 하니 미운털이 박혔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이슈는 그간 신태용 감독의 든든한 지원자를 자처했던 에릭 토히르 회장의 태도였다. 사우디아라비아전을 앞둔 사전 기자회견장에서 신 감독은 토히르 회장이 일본전 대패 직후 라커룸을 찾은 것과 관련한 질문을 받았다. 신 감독은 토히르 회장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를 했고,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동남아에서는 '체어맨'의 힘이 감독의 권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상당히 잦다.
정말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감독을 병풍처럼 세워두고 라커룸에서 일장연설을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좋든 안 좋든 그 자체로도 한국에서는 무례한 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남아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 감독도 그 점을 잘 알기에 토히르 회장과 관련된 각종 행사와 경조사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4 AFC 카타르 아시안컵 본선 조 추첨식 때는 한국에서 머물다 카타르 직항편이 있는데도 토히르 회장을 자카르타에서 만나 '모시고' 도하까지 날아가는 수고를 들였을 정도로 신 감독은 토히르 회장을 깍듯이 대했다.
어쨌든 당시 3차 예선 2연패를 당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토히르 회장에게서 좋은 코멘트가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인도네시아 현지 매체의 분석이었다.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질 경우 감독 교체 가능성을 내다보는 현지 미디어의 기사가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 감독은 벼랑 끝에서 또 한 번 매직을 발휘했다. 인도네시아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홈에서 2-0으로 완파했다. 사우디아라비아전 역사상 첫 승이자, 인도네시아의 순위를 C그룹 3위까지 끌어올리는 발판이 되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경질설은 이 승리 한 번에 삽시간에 지워졌다. 신 감독은 다시 팀에 집중할 수 있는 모멘텀을 얻었다.
▶ 인도네시아의 명백한 배신, 2024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
인도네시아 축구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이 걸린 스테이지에 오른 후, 신 감독의 초점은 오로지 월드컵 3차 예선에 맞추어져 있었다. 관련된 일화 하나가 있다. 지난해 7월 말 영덕에서 열렸던 베스트 일레븐의 풋볼 페스타 대회 때마침 고향 영덕을 방문해 대회 현장을 찾은 신 감독에게 동남아 챔피언을 가리는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 때가 되면 인도네시아를 찾겠다는 말을 건넸었다.
그랬더니 신 감독은 웃으며 그 대회보다는 11월 월드컵 2연전(일본·사우디전)에 오라는 답했다. U-22 선수들 위주로 경험을 쌓기 위해 나가는 대회라 그때보다는 100% 전력을 가동할 수 있는 월드컵 예선전에서 팀을 지켜봐달라는 얘기였다. 신 감독의 이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주목해야 할 건 해당 발언의 시점이다.
3차 예선 진출이 확정된 직후였으며, 3차 예선에서 한 경기도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요컨대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 멤버 구성과 관련해서 인도네시아축구협회 그리고 에릭 토히르 회장과는 한참 전부터 교감을 나누고 승인을 받았다는 얘기다. 즉, 대회에 임박해 갑자기 U-22 선수들로 힘을 빼고 팀을 구성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12월 13일 하노이 국제공항에서 베트남으로 입국했을 때 만난 신 감독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베트남과 대결을 두고 '빅 게임' 아니냐고 농담을 섞어 말을 건넸더니 신 감독은 "무슨 소리냐"라고 웃어넘겼다. 물론 대회에 출전한 만큼 주어지는 경기 자체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인도네시아는 U-22 선수 위주로 대회에 임했고, 타 팀들이 100%를 쏟아내는 대회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처지에서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은 애당초 100%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대회였다. 인도네시아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귀화 선수 정책이 발목을 잡았다.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은 FIFA의 국가대표 의무 차출 대회가 아니다. EAFF(동아시아축구연맹)의 E-1 풋볼 챔피언십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겠다. 한국 역시 이 대회에서 유럽파를 호출하지 못하듯, 인도네시아도 최근 급격히 늘어난 혼혈 유럽파 선수를 의무적으로 부르지 못한다.
실제로 이바르 제너·저스틴 후브너 등 신 감독이 그래도 데려가려고 했던 유럽파 선수들도 오지 못했다. 겨우 마르셀리노 페르디난과 라파엘 스트라위크를 데려오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그마저도 마르셀리노가 라오스전에서 다치기까지 했다.
신 감독이 차라리 어린 선수들을 데려가서 경험을 쌓아 훗날 A대표팀의 전력으로 흡수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게 인도네시아 처지에서는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을 유의미하게 치르는 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성적이 나지 않자 이를 빌미로 신 감독과 계약을 파기하고 클라위버르트 감독을 데려왔다.
신 감독의 아들인 성남 FC의 신재원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성토하는 게 이해가 될 만큼, 황당할 법한 상황인 것이다. 만약 인도네시아가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에 진정 욕심을 품고 있었다면 U-22 선수들의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던 신 감독의 계획을 승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당연히 유럽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대거 차출도 사전에 준비하고 실행하는 노력도 들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신 감독의 AFF 미쓰비시 일렉트릭컵을 향한 전략적 접근법이 분명 달랐을 것이며, 시간적 여지도 분명히 있었다. 대회를 치르는 순간까지 신 감독의 계획에 동의했던 인도네시아축구협회는 돌연 안색을 바꾸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일각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글·사진=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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