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이 됐지만, 달라질 건 없다.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들을 믿는다.
도드람 2024-2025 V-리그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가 21일 서울 청담 호텔리베라에서 진행됐다. 공식 행사가 진행되기 전에는 각 팀 감독들과 선수들이 별도 마련된 장소에서 취재진과 미리 이야기를 나누는 사전 인터뷰도 진행됐다.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 더 다양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더스파이크>는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틸리카이넨 감독에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위를 올려다보며 시작하는 첫 봄배구는 어떤 느낌인가”였다. 최근 네 시즌 연속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며 늘 정상의 위치에서 봄배구에 임했던 대한항공이지만, 이번에는 3위 자리에서 봄배구를 맞이한다. 처음으로 도전자의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틸리카이넨 감독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실 이런 느낌을 다른 나라에서 지도자로 활동할 때는 많이 받아봤다. 그래서 특별히 새로운 상황은 아니다.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다가올 큰 싸움들에서 이겨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현대캐피탈이 가장 높은 곳을 차지했고, KB손해보험도 정말 많이 치고 올라왔다. 그만큼 우리가 정규리그 때 고전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나 정규리그는 끝났다. 다시 열심히 싸워야 할 때”라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정규리그에서의 고전으로 인해 틸리카이넨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추구해온 배구에 대한 약간의 의심을 갖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틸리카이넨 감독은 단호했다. 그는 “이번 시즌에는 우리가 추구했던 배구가 잘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수들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계속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추구하는 배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이 모두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생각과 말에 대한 확신은 있다. 나는 자신이 있다. 자신이 없다면 경기장에 가지도 않는다”며 굳은 심지를 드러냈다.
한편 대한항공의 봄배구에 있어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새로운 외국인 선수 카일 러셀(등록명 러셀)이다. 먼저 틸리카이넨 감독은 “마지막 정규리그 두 경기에서 러셀의 경기 내용은 긍정적으로 봤다. 남은 시간 동안은 러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팀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외에는 러셀을 터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플레이스타일은 유지하되, 러셀의 타점 높은 플레이는 살려갈 계획”이라며 러셀에 대한 중간 평가와 향후 준비 계획을 밝혔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러셀이 삼성화재에 있던 시절에 그를 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 당시의 러셀과 지금의 러셀을 비교하면 어떻냐는 질문에 틸리카이넨 감독은 “나이가 들면서 더 성숙해졌다. 기술적으로도 발전했을 것이다. 다만 삼성화재 때와 직접 비교하는 건 어렵다. 우리가 추구하는 배구와 당시 삼성화재의 배구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피지컬에서 나오는 파워풀하고 타점 높은 공격과 서브를 기대하고 있다”는 대답을 내놨다.
틸리카이넨 감독과는 러셀의 합류와 함께 주목할 만한 두 가지의 플레이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먼저 러셀이 4번 자리에서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좌우 스위치를 시도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틸리카이넨 감독은 “스위치도, 정 위치 플레이도 모두 옵션이다. 사실 스위치를 하는 게 공격력은 극대화되는 게 맞다. 하지만 스위치를 안 하는 게 나은 상황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포짓의 왼쪽 공격과 아웃사이드 히터의 오른쪽 공격이 모두 ‘나쁘지 않다’ 정도일 때, 스위치를 하면 서로의 공격력이 확실히 업그레이드된다면 안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포메이션과 상대 블로커에 따라 변수가 있다. 세터 1번일 때 일본이나 유럽 팀들 같은 경우 스위치 플레이를 많이 하는 추세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기본적인 틀은 있다. 거기서 상황에 따른 변화를 줄 뿐이다. 우리 선수들은 스마트하다. 본인들이 알아서 변화를 잘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상황에 맞는 변칙적인 플레이를 할 것임을 밝혔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시즌 막바지에 대한항공이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이동공격 옵션의 지속 활용 여부다. 이동공격은 아포짓의 오른쪽 후위공격이 약한 팀이 오른쪽에서의 공격 루트를 뚫기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러셀이 합류한 지금 이동공격의 효용성이 여전할지가 궁금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같이 지켜보자(We’ll see, 웃음). 비시즌 때부터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기 위해 선수별로 맞춤형 준비를 했다. 이동공격은 그 중 하나다. 우리가 2년 전 컵대회에서 10명도 안 되는 엔트리로 어떻게든 승리하며 준결승까지 올라갔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 때와 다르지 않다. 지금의 구성원에서 어떻게든 승리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여러 가능성을 열어뒀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아직도 보여주지 않은 배구적 아이디어가 있는지 묻자 “당연하다”고 칼같이 답했다. “힌트를 줄 수 있겠냐”는 질문에는 손으로 쌍안경 모양을 만들며 “경기장에 와서 직접 봐라. 지금은 입단속을 해야 한다(웃음). 누구 좋으라고 미리 알려주겠나”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처럼 언더독이 됐어도, 우승 DNA가 각인돼 있는 명감독에게는 여전히 여유가 넘쳐흘렀다.
사진_호텔리베라/문복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