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축구연맹(FIFA)은 2022년 5월 ‘축구장 천연잔디 평가 및 관리 프로그램(Natural-Pitch Rating System·Natural Playing Surfaces Quality Programme)’을 공표했다. 국제적으로 표준화한 기준을 통해 잔디 상태, 내구성, 성능 등을 평가해 선수 안전과 경기 품질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이다. 올바른 평가와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기 앞서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먼저 필요하다고 판단해 마련한 것이다.
프로그램은 다섯 가지로 잔디를 종합 평가한다. △잔디 상태(30점) △내구성(25점) △배수능력(20점) △경기력 성과(15점) △환경 적응성(10점)이다. 다섯 가지 항목에서 모두 만점을 받으면 100점이 된다. 잔디 자체뿐만 아니라 배수 능력 등 시공 기술, 선수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 지역별 기후에 맞는 품종이 깔린 뒤 맞춤형 관리까지 이뤄지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게 핵심이다. 평가항목별로 다양한 세부 항목들이 있고 세부 항목도 평가 결과에 따라 점수가 상당히 세분화돼 있다.
FIFA는 “선수 안전 보장, 경기 품질 유지, 환경적 지속 가능성, 국제 표준화 등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라고 자평했다. FIFA는 “스페인, 영국, 독일 등이 이를 근거로 잔디 질을 국제 표준으로 평가하고 관리한다”고 전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FIFA가 평가한 대표적인 최고 천연잔디 구장은 2022년 월드컵이 열린 알 자눕 스타디움과 알 바이트 스타디움 등이다. 두 곳 모두 최신 잔디 냉각 기술까지 갖추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엉망이 된 축구장 잔디 관리가 도마에 올랐다. 국회 국정감사 및 현안 질의에서도 이미 이슈가 됐고 이번 달 말에 열리는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뤄진다.
한국은 아직 FIFA 천연잔디 평가 시스템을 전혀 적용하지 않고 있다. 최근 전국 각지 천연잔디 상태가 문제가 되면서 프로축구연맹이 천연잔디 상태를 축구단 평가 기준 또는 클럽 라이선스 필수 요건으로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당위성은 충분하지만 연맹, 대한축구협회조차 FIFA 천연잔디 평가 및 관리 시스템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하고 있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게 문제다. 한 잔디업계 관계자는 “품종 자체 문제보다는 시공 당시 부실공사 여부, 적극적 투자에 의한 관리 유무에 따라 그라운드 잔디 상태가 천양지차”라며 “무엇보다 잔디 생육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이며 그게 어디에서,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를 알아야 평가든 징계는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프로축구연맹은 인조잔디를 평가하고 등급화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축구협회는 2026년부터 3개 등급으로 인조잔디 등급제를 본격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나 천연잔디, 하이브리드 잔디(인조 잔디 5% + 천연 잔디 95%)를 평가하는 기준은 없다. 기후 탓, 담당 인력 문제, 예산 부족, 대관회수 등만 거론할 뿐, 정확하면서도 과학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정확한 대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 양인규 연구원은 “FIFA는 천연잔디까지 점수별로 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다”며 “한국도 FIFA 프로그램에 따라 평가한 뒤 점수가 낮은 지표부터 중점적으로 관리하면 천연 잔디도 어느 정도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프로축구단 관계자는 “연맹이 객관적인 평가 기준도 마련하지 않고 징벌적인 조치만 취하면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며 “연맹이 평가 기준부터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수립하고 평가하면서 부족한 게 드러난 부분부터 지방자치단체, 관련 단체 및 기업과 해결하고 필요할 경우 공동사업화하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