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현장.Plus] 자진 삭발과 자진 사퇴, '염기훈 나가'와 '수원의 사나이 염기훈' 사이에서

입력
2024.05.26 07:00
염기훈 수원삼성 감독. 김희준 기자

[풋볼리스트=수원] 김희준 기자= 삭발을 하고 경기에 임한 날 염기훈 감독은 사퇴했다. '염기훈 나가'를 연호하던 수원 팬들은 염 감독이 떠나는 순간 '수원의 사나이 염기훈'을 불렀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을지 모른다. 염 감독은 올해 1월 수원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지난해 9월 말 김병수 전임 감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감독 대행으로 수원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지만, 7경기를 치러 3승 2무 2패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둔 점이 반영됐다.

이전까지 선수 염기훈을 지지하던 수원 팬들은 곧바로 돌아섰다. 염 감독의 역량 문제는 차치하고, 정글이라 불리는 K리그2에서 지도자 경험이 없는 감독이 팀을 승격으로 이끌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구단에 대한 비판은 물론 정식 감독직을 수락한 염 감독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쏟아진 이유다.서울이랜드전 이후 수원삼성 팬들. 김희준 기자

팬들의 우려는 실제가 됐다. 염 감독은 3월 리그 4경기 2승 2무를 거둔 뒤 4월 5경기 4승 1무로 상승세를 탔다. FC안양과 지지대 더비에서도 승리를 거뒀고, 수원을 리그 1위로 이끌어 4월 이달의 감독상도 수상했다. 그러나 5월 5경기에서 내리 5연패를 당하며 내리막길을 걸었고, 지난 충남아산FC전 이후에는 팬들에게 이른바 '버스 막기'를 당해 팬들과 10여분 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구단은 염 감독을 변함없이 지지했다. 최대한 염 감독이 전술 철학을 자유롭게 펼치게끔 배려했다. 박경훈 단장을 비롯한 구단 수뇌부들은 염 감독에 대한 지원이 자칫 섭정으로 이어지는 걸 경계했다. 최근 경기 후 피드백 과정에서 이도영 전력분석팀장의 개입을 늘린 것조차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염 감독도 의지를 다졌다. 이번 경기를 앞두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충남아산전에서 감독으로서 데미지와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이를 승리와 반등으로 연결하고자 노력했다. 우연찮게 양형모, 이종성, 장호익, 백동규 등 일부 고참들도 삭발을 감행했다. 그만큼 모두가 분위기 반전을 원했다. 염 감독이 "내가 선수들보다는 길다"고 말하긴 했어도 그 마음은 누구보다 컸을 테다.

그럼에도 운명은 염 감독을 외면했다. 25일 서울이랜드전은 염 감독 입장에서 억울한 측면도 일부 있었다. 수원은 골대를 두 번 이상 맞췄고, 이랜드는 행운이 섞인 동점골로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물론 그 이후 대처에서는 수원이 많이 아쉬웠지만, 김도균 이랜드 감독조차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고 인정할 정도로 경기력 이외의 것이 작용한 경기였다.서울이랜드전 종료 후 수원삼성 선수단과 팬들. 김희준 기자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은 선수단이 관중석에 인사할 때마다 "염기훈 나가"를 외쳤다. 이와 함께 경기 전에도 내걸었던 '욕심이 된 헌신, 의심이 된 진심', '그대 먼저 헤어지자 말해요' 등 염 감독을 비판하는 걸개도 내보였다. 선수단이 경기장을 나서자 곧바로 버스가 나오는 출구로 가서 지난 경기에 이어 다시 한 번 버스 막기를 시도했다.

염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물러나는 걸 구단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시기는 예정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미 진을 친 팬들을 보고 즉시 사임하기로 마음먹었다. 박 단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리 구단을 이끌고 가기에는 쉽지 않다는 걸 본인도 생각하고 내게 와서 '단장님,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단장으로서 마음이 아팠다"고 소회했다.

박 단장과 의사를 교환한 염 감독은 버스를 타는 대신 주차장을 직접 걸어올라왔다. 이후 사임을 발표했다. 염 감독은 "정말 오랫동안 수원에 있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웃기도 많이 웃었는데 마지막에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스럽다"며 "그동안 정말 감사했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다. 수원에 있으면서 행복했다. 다시 또 인사드리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에는 거의 울음으로 목이 멘 소리를 낸 염 감독은 그대로 주차장 아래로 내려갔다.염기훈 전 수원삼성 감독(왼쪽)과 박경훈 수원삼성 단장. 김희준 기자

염 감독이 사퇴 발표를 마치자 수원 팬들은 곧바로 '수원의 사나이 염기훈'을 부르기 시작했다. 감독이 아닌 구단 전설로서 염기훈에게 최선의 예우를 해준 셈이다. 일부 수원 팬들이 "왜 염기훈에게 응원가를 부르냐"라고 반문할 만큼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처사였다. 다른 수원 팬들에게 돌아온 답변은 "염기훈은 우리의 레전드"라는 말이었다.

감정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삭발을 할 정도로 승리에 대한 의지를 다진 건 패배하면 물러나겠다는 결연함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염 감독에게 물러나라고 외치던 수원 팬들이 고개숙이며 돌아서던 염 감독을 향해 선수 시절 응원가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염 감독은 팬들에게 감사함과 죄송함을 동시에 가졌고, 팬들은 염 감독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다.

사진= 풋볼리스트<저작권자 Copyright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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