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지난달 찾은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의 AGL(에이지엘) 본사.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유명 수학 학원 뒤로 보이는 6층짜리 건물 입구로 파랑·빨강·노랑·초록의 구글 로고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회사 안으로 들어서자 자유로우면서 열띤 분위기의 회의가 각층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직원들의 국적도 한국은 물론 독일, 대만 등으로 다국적이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구글코리아의 거점 오피스가 아닌가 했을 것이다.
이곳은 구글코리아와는 아무 관계없는 곳이지만 글로벌 구글골프의 본산과도 같은 곳이다. ‘전 세계 골프 실시간 예약’을 기치로 내건 AGL은 지난 여름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 구글과 손을 잡으면서 업계를 발칵 뒤집었다. 2019년 탄생한 한국의 스타트업이 구글을 뚫은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구글에서 맛집을 검색하면 예약 화면이 뜨듯이 이제 전 세계 골프장도 이름을 치거나 구글맵에 뜨는 빨간 점을 찍으면 바로 예약부터 결제까지 가능하다. 이 시스템을 국내 골프테크 기업인 AGL이 제공하고 있다. 실제 예약과 결제가 이뤄지면 AGL에 판매 수수료가 돌아가는 구조다.
FIFA 회원국 숫자와 맞먹는 국가별 트래픽
구글 예약(Reserve with Google)과 함께한 100일 남짓한 시간 동안 AGL이라는 회사와 세계의 골프 시장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까. 하와이 출장에서 이제 막 돌아온 짐 황 AGL 대표는 ‘205’와 ‘5000’이라는 숫자를 얘기했다. “구글 서비스 이전에 AGL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해외 골퍼의 비중은 20% 수준이었는데 현재는 85%까지 올라왔습니다. 오픈 초기 20여 개 국가의 골퍼 유입이 있었는데 지금은 205개 이상 국가의 골퍼들이 AGL 서비스로 유입되고 있고요.”
“205개요?” 놀라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숫자다.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된 회원국이 211개인데 그에 육박한다고? 황 대표는 “구글을 통해서 AGL의 서비스인 타이거부킹으로 흘러 들어오는 웹 트래픽(인터넷 접속량)을 국가별로 집계하면 205개다. 영어권 국가가 굉장히 많이 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 트래픽의 증가도 눈에 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다 할 마케팅이 없었는데도 서비스 오픈 전과 대비하면 트래픽이 5000% 넘게 증가했다. 우리의 과제는 이런 관심이 실제 예약과 결제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트래픽 유입 대비 예약 및 결제율도 50% 수준으로 높은 편이지만 구글과 공동 마케팅을 통해 이 확률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클릭 몇 번으로 동남아 넘어 미국·유럽 골프장 예약·결제
구글을 통해 해외 골프장을 예약하는 한국 골퍼도 늘었다. 구글과 무관하게 타이거부킹 집계만 있던 전년 대비 112%가 늘었다. 구글 서비스 론칭 후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미국과 유럽 골프장 예약률이 100% 이상 증가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거의 일본이나 동남아만 찾던 우리나라 골퍼들도 적극적으로 시야를 넓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한국 골프장을 방문하는 외국인도 많이 늘지 않을까. 황 대표는 “외국에서 예약과 결제가 가능한 우리나라 골프장도 현재 제주를 중심으로 100곳 정도 있다”면서도 “아쉬운 점은 아직도 폐쇄적인 문화가 남아있어 외국인 손님 받기를 꺼려하는 곳이 많다는 것”이라고 했다. “해외 골퍼들이 인바운드 관광 시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약·결제 시스템을 무료로 제공하고 적자를 보면서도 우리나라 골프장을 밖으로 알리려는 중인데 이런 부분은 좀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연내 200곳 이상으로 시스템 연동 국내 골프장 수를 늘려가야죠.”
유럽 최대 항공그룹 루프트한자서도 러브콜
AGL은 벤처 투자 빙하기에도 국내 4대 금융그룹 벤처캐피털(VC)로부터 300억 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하는 등 구글과 손잡기 이전부터 전도유망한 회사로 통했다. 구글을 등에 업은 지금은 세계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위치에 올랐다. 유럽 최대 항공그룹인 루프트한자로부터 먼저 연락이 와 현재 사업실증(PoC) 협의 중에 있기도 하다. 황 대표는 “소비자가 항공을 예약하면 도착지의 골프장 예약 정보가 뜨는 ‘항공과 골프’가 종전의 개념이었다면 우리는 ‘골프와 항공’으로 가고 있다. 골프 예약을 하면 자동으로 항공 예약 안내가 뜨도록 하는 거다. 항공 다음은 호텔, 렌터카, 맛집 등으로 계속 연계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구글과 루프트한자에 이어 또 한 번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할 소식을 준비 중이냐는 물음에 황 대표는 “항공과 호텔, 렌터카 산업과 제휴가 필수라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 연동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번에 하와이에 다녀온 것도 그와 관련한 사전 정지 작업을 위해서였다”며 “내년 상반기에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덧붙여 “전 세계 골프장의 55%가 미국에 있다. 글로벌 골프테크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미국 시장 내 인지도와 영향력 확보가 필수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미국 시장에서도 놀랄 만한 소식을 가져올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그래, GDS가 답이다!
이쯤 해서 다시 갖게 되는 궁금증 하나. 구글은 대체 왜 AGL과 손잡은 걸까. 미국에도 관련 사업자가 많을 것 같은데 굳이 왜 AGL이었을까. 황 대표는 “세계 최초의 골프 GDS(글로벌 예약·판매 시스템)를 구축한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골프장 파트타임 코스관리로 시작해 일본 골프장 근무 경험과 골프장 인수합병(M&A) 업무까지 국내외 골프장 업계에서 20년 경력을 쌓은 황 대표는 십수 년 전에 이미 지금 같은 사업을 구상했다고 한다. 미국의 한 저비용 항공사가 늘 빈 좌석 없이 손님을 꽉꽉 채우는 비결에 GDS가 있다는 걸 알고 무릎을 탁 친 게 시작이었다. 항공 분야에 먼저 도입된 GDS는 항공 스케줄과 운항정보 조회, 잔여 좌석 조회·예약을 책임진다.
“그때만 해도 골프장 티타임 장사는 정말 맨땅에 헤딩 식이었거든요. 연습장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전단지 돌리거나 술집에 가서 영업을 해야 했어요. 그래도 안 팔려서 늘 골치이고. 그러던 중에 ‘아, 이거다’ 싶었던 거죠.” 황 대표는 여행과 뗄 수 없는 골프장 산업에도 GDS를 도입하는 구상을 시작했고 유능한 개발자들을 영입해 시스템을 갖춘 뒤로는 세계 1등 플랫폼이라는 상징을 가진 구글과의 연동을 목표로 달렸다. 직접 뛰어 만나고 설득해 개별 골프장들은 물론 주요 국가별 골프협회 등 유관 단체와 관광청을 뚫었다. 이렇게 구축한 제휴 골프장이 현재 세계 30개국 160여 도시의 2000개 이상이다. 영국 골프먼슬리 선정 ‘2023/24 영국·아일랜드 100대 코스’ 1위에 빛나는 로열 카운티다운, 내년 디 오픈 코스인 로열 포트러시, 골퍼들의 영원한 로망인 페블비치 골프링크스 등도 포함이다.
이러다 무한 경쟁? 오히려 좋아
여행 관련 매출만 연 40조 원에 이르는 구글은 항공과 호텔, 렌터카에 이어 골프를 새로운 먹거리로 점찍고 함께할 사업자를 찾고 있었다. 항공이나 호텔처럼 GDS를 구축한 업체를 원했지만 미국의 대형 부킹 업체도 그런 시스템은 갖추지 못한 상황. 그전부터 꾸준하게 실리콘밸리 마운틴뷰의 구글 본사에 제안을 넣어왔던 AGL에 기회가 온 것이다. 테스트와 미팅에 장장 1년 반이 걸렸지만 서비스 론칭은 예상보다 빨랐다. AGL은 골프 GDS에 대한 시스템 연동이라는 카드로 익스피디아, 아고다, 부킹닷컴 등 50여 개의 글로벌 온라인여행플랫폼(OTA)과 제휴 중이었다. 구글은 AGL과의 동행을 망설일 이유를 찾지 못했다. AGL과 파트너십으로 글로벌 골프 트래픽을 확보한 구글은 여행 서비스와 연계해 본격적인 수익 증대를 꾀한다는 계산이다.
호텔 분야의 경우 구글 사이트에서 인기 호텔을 검색하면 호텔스닷컴, 익스피디아 등 예약할 수 있는 사이트 10여 개가 각기 다른 1박 가격과 함께 쫙 뜬다. 이와 달리 골프는 골프장을 검색하면 ‘온라인 예약’이 바로 뜨고 이걸 클릭해 들어가면 타이거부킹에 연결되게 돼있다. 호텔스닷컴, 익스피디아, 타이거부킹을 구글은 프로바이더(예약 제공업체)라고 한다. 호텔 예약은 프로바이더가 넘치는데 골프는 사실상 하나인 상황. 지금처럼 독점 구조로 사업하면 될 텐데 황 대표는 골프도 호텔처럼 프로바이더가 다양해지길 원한다.
“타이거부킹으로 고객도 상대하고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그래도 B2B(기업 간 거래) 비즈니스예요. 타이거GDS로 고속도로를 깐 셈이니 거기에 프로바이더를 붙여주는 애그리게이터(여러 회사의 서비스 정보를 모아 제공하는 역할)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호텔 분야에 자리를 잡은 OTA들이 구글골프의 프로바이더로 속속 들어와 주는 게 AGL이 바라는 그림이다. 현재 일본 기업들 중에 관심을 가지는 곳이 꽤 된다고. 이런 상황이 위협이 될 수도 있겠지만 황 대표는 느긋하다. 오히려 기회로 여기는 듯하다. 고객이 속한 국가의 간편결제 시스템(구글·애플·알리 페이 등)까지 제공하면서 다국어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곳은 현재 타이거부킹밖에 없기에 기술과 노하우 전수에 있어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골프장에 ‘가성비’가 대세 되는 그날까지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부터 트럼프 턴베리, 로열 포트러시 등 내로라하는 전 세계 유명 코스에서 업무상 라운드할 일이 많은 황 대표에게 세계 각국 골프장과 한국 골프장의 문화 차이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한국의 골프장 문화도 세련된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지만 그린피는 여전히 너무 비싸다”고 지적했다. “잘 알려졌듯 미국은 그린피로 50만 원, 100만 원 받는 곳도 있지요. 하지만 평균 그린피로 따지면 한국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우리는 골프코스라는 본연의 기능보다 부대적 기능으로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새로운 골프 세대한테는 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잖아요. 예를 들어 주니어 골퍼 대상 50% 할인 같은 것도 없지 않습니까. 골프장들이 당장 몇 년은 장사하는 데 문제없겠지만 10년, 20년 뒤는 정말 어떻게 할 겁니까.”
황 대표는 호텔 예약에 가격 비교 문화가 정착됐듯 골프장도 유사한 방향으로 활성화되도록 유도해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항공과 호텔 산업에 GDS가 도입된 뒤 각각의 산업 생태계는 최대 5배 성장했습니다. 골프 산업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판매하고자 하는 날짜와 시간의 티타임을 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가성비 있게 골퍼들에게 실시간 제공하면 골프장 입장에서도 결국 남는 장사가 될 겁니다. 합리적인 그린피로 공급해도 판매량이 늘어 매출 확대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문득 AGL의 뜻이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Above Golf and Links’다. 골프를 넘어 전 세계를 연결한다는 의미. 타이거GDS의 타이거는 대표가 범띠여서 그렇게 지었다는 황 대표는 하와이를 찍고 두바이로 날아갔다. 글로벌 포럼 참석과 인재 영입을 위해서다. 11월에 그가 해외에 체류한 날짜를 세어보니 무려 21일이다. 직접 일일이 전 세계를 연결하려는 걸까. 돌아오면 또 어떤 보따리를 빼꼼 열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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