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다가 KBL은 외국선수가 차지하는 비중도 큰 리그다. 드래프트든 자유계약제든 ‘특급’을 데려오면 최소한 중위권 성적을 거두며 면죄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국내선수가 중심이 되는 ‘K-리빌딩’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안양 정관장의 리빌딩이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인삼신기’ 1기는 여전히 ‘전설의 레전드’로 회자되고 있는 게 아닐까.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됐으며, 팀명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정관장으로 통일했습니다.

정관장이 약 10년에 걸쳐 만들었던 영광의 시대는 양희종의 입단이 시발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 KBL 신인 드래프트는 ‘황금 드래프트’라 불렸다. 실제 2007 드래프트 출신 선수 가운데 대다수가 슈퍼스타 레벨로 성장했고, 10순위로 선발됐던 함지훈(현대모비스)은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다.
당시 드래프트는 대학선수들이 졸업을 앞둔 1월 또는 2월 초에 열렸던 데다 1~4순위 지명권 확률은 이전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4개 팀에 25%씩 주어졌다. 정관장은 2005-2006시즌에 1경기 차로 7위에 머물렀지만, 덕분에 ‘황금 드래프트’에서 25%의 1순위 확률을 획득했다. “물 반 고기 반”이란 표현이 있었을 정도로 수많은 유망주가 드래프트에 참가했지만, 양희종이 연세대 재학 시절 보여준 에너지는 정관장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유도훈 감독과 연세대 연습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상대는 외국 대학이었어요. 아, 이 녀석이 외국선수들을 상대로 겁도 없이 리바운드를 따내더라고요. 수비도 죽기 살기로 했고, 덕분에 동료들은 공격에 더 힘을 쏟을 수 있었죠. 그때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1순위면 무조건 양희종’이라고요. 앞에 있는 팀들이 다른 선수를 지명해 속으로 ‘만세’ 불렀죠.” 3순위로 양희종을 선발했던 당시 정관장 관계자의 회고다.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던 만큼, 정관장은 양희종이 주축으로 뛰며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줬다. 2006-2007시즌 국내선수 득점 4위에 올랐던 베테랑 슈터 양희승을 부산 KTF(현 수원 KT)에 넘겨주며 황진원을 영입했다.
양희종은 기대대로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2007-2008시즌 신인 가운데 유일하게 54경기를 모두 소화하며 높은 팀 디펜스 이해도를 보여준 것은 물론,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로 정관장의 에너지 레벨을 끌어올렸다. 속공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당시 정관장이 내세웠던 런&건에 속도감을 더해준 것은 물론이었다. 정관장 관계자는 “돌아보면 희종이 덕분에 리빌딩도 시작할 수 있었던 거죠. 지금의 정관장을 논할 때 희종이는 그야말로 초석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데뷔시즌 정관장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힘을 보탰던 양희종은 2년 차 시즌에 한 단계 더 성장했다. 허슬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루키시즌에 지적됐던 3점슛(평균 1.1개, 성공률 36.4%)도 향상된 모습이었다.
데뷔 첫 수비5걸에도 선정되며 ‘수비대마왕’의 탄생을 알렸지만, 정관장은 양희종의 성장과 별개로 변화의 소용돌이를 맞았다. 시즌 개막을 두 달 앞둔 시점에 유도훈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은 정관장은 이상범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최종결과는 29승 25패 7위. 플레이오프에 오르진 못했지만, 사령탑이 시즌 개막 직전 물러난 데다 시즌 막판 양희종이 어깨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됐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아쉽지만 잘 싸웠다’라고 돌아볼 수 있는 시즌이었다.
다만, 정관장은 시즌 중반부터 물밑에서 리빌딩을 위한 대대적 변화를 추진했다. 군 입대를 앞둔 양희종과 함께 팀의 미래를 이끌 젊은 가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주희정이 2009-2010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는 것도 정관장의 고심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이때 서로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팀으로 부상한 팀이 서울 SK였다. ‘윈나우’를 지향했던 SK는 주전 라인업에 무게감을 더해줄 베테랑 가드 주희정을 원했다. 주희정 영입을 위해 주전 포인트가드를 트레이드 카드로 내세운 제3의 팀도 있었지만, 정관장이 원했던 건 오로지 김태술이었다.
SK 역시 김태술을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고 싶어 했던 터라 양측은 입장 차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양 팀에 소속됐던 외국선수들이 나란히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정관장과 SK에겐 개편보단 발등에 떨어진 불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고, 자연스럽게 빅딜 논의도 미뤄졌다. 그렇게 2008-2009시즌이 종료됐다.
정규리그 MVP에 선정된 주희정이 “FA가 되면 우승 전력을 갖춘 팀에서 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라는 코멘트를 남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정관장과 SK의 트레이드도 다시 논의가 시작됐다. 주희정은 이상범 감독대행과의 면담을 통해 의사를 재차 밝혔고, 이상범 감독대행은 “감독으로 승격되면 트레이드를 추진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후 이상범 감독대행은 정식 감독이 됐고, 미국 출장 도중 김진 당시 SK 감독을 만나 다시 트레이드를 조율했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주희정↔김태술+김종학이라는 빅딜이 성사됐다. “희종이, (김)일두, (신)제록이 등 주축선수들이 군 복무를 앞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주)희정이의 의사와 별개로 리빌딩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라는 게 정관장 관계자의 회고다.
양희종이 3순위로 선발됐던 2007 드래프트의 1순위가 바로 김태술이었다. 정관장은 빅딜을 통해 이미 국가대표 경험까지 있는 84년생 절친 2명을 팀의 중심으로 구축, 본격적인 리빌딩 버튼을 눌렀다.

양희종의 전역 후 첫 풀타임 시즌이 될 2011-2012시즌을 내다보고 진행한 트레이드였던 만큼, 정관장으로선 김태술의 병역 의무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다. 상무는 이미 지원자 모집이 마무리된 까닭에 김태술은 트레이드 발표 후 약 2개월 만에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되며 대체 복무에 돌입했다.
김태술-양희종이라는 꿈의 조합을 구성했지만, 이들이 자리를 비운 2009-2010시즌의 한계는 명확했다. 정관장은 16승 38패 승률 .296 8위에 머물러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아이러니하게도 윈나우를 위해 주희정을 영입했던 SK도 같은 승률에 그쳤다).
이 와중에도 리빌딩에 필요한 조각을 모으는 작업은 계속됐다. 정관장은 시즌 초반이었던 2009년 11월 12일,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김성철을 영입했다. ‘리빌딩 운운했던 팀이 왜 30대 중반의 슈터를?’이라며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관장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젊은 선수만 모아놓는다고 리빌딩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들이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조언도 하고, 팀이 당장 상대와 경쟁 가능한 수준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탤 지원군도 필요하죠. 김성철은 FA로 떠나기 전 우리 팀에서 뛴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수였습니다.” 정관장 관계자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큰 수확도 있었다. 정관장은 높이 보강이 필요했던 KT에 나이젤 딕슨을 넘겨주며 도널드 리틀과 2010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확보, 리빌딩에 박차를 가했다. 정관장과 KT는 나란히 2008-2009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팀들이었다. 즉, 2010 드래프트 1~4순위 가운데 2명을 선발할 수 있게 된 것.
치밀하게 세운 리빌딩 전략에 우주의 기운까지 더해졌다. 정관장은 2010 드래프트 순위 추첨을 통해 1~2순위를 독식했고, 이를 통해 박찬희와 이정현을 지명하며 훗날 돌아올 김태술과 양희종의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공감할 이야기(참고로 필자의 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흔히 복무기간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을 ‘꺾인다’라고 표현한다.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을 한 번만 더 버티면 되는데 그 1년이 지옥 같았다. 어제도 여름, 오늘도 여름…. ‘아니, 도대체 봄이 오긴 오는 거야?’ 싶었다.
정관장의 리빌딩 선언 후 두 번째 시즌이 꼭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양희종의 신인 시절을 제외하면 매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정관장은 2010-2011시즌 역시 16승 38패 9위에 머물렀다. SBS를 인수한 이후 가장 낮은 순위였다.
신인 박찬희와 이정현은 경험치를 쌓으며 무럭무럭 성장했지만, 리빌딩을 위해 지불한 세금도 만만치 않았다. 정관장은 개막 6연패를 경험하는가 하면, 시즌 막판 11경기에서는 단 1승에 그쳤다. 38패 가운데 23경기가 10점 차 이상의 패배였다.
당시 정관장 관계자는 이 시기에 대해 “이 감독과 항상 사직서를 갖고 다녔어요. 이 감독 역시 주위의 시선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겁니다”라고 돌아봤다. 이상범 감독 역시 “어휴…. 리빌딩, 그거 보통 일 아니에요. 누가 한다고 하면 보따리 싸 들고 가서 말릴 겁니다(웃음). 그 형님과 쓰디쓴 소주 많이 마셨죠”라고 말했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라고 했던가. 리빌딩 선언 후 두 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었던 정관장에 그토록 원했던 ‘마지막 퍼즐’이 찾아왔다. 2009-2010시즌 플레이오프 탈락으로 갖고 있던 25%의 확률이 2011 드래프트(라 쓰고 오세근 드래프트라 읽는다) 1순위라는 행운으로 이어진 것.

산성 월담,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전성시대
조각이 모두 갖춰져 무서울 게 없을 것만 같았던 2011년 여름의 어느 날. 이상범 감독의 한숨이 잊히지 않는다. “다들 잘 지내고 있대요? 저도 우리 선수들 TV로 보고 있잖아요.” 호화 전력을 갖춘 팀의 딜레마. 바로 대표팀 차출이었다. 정관장은 양희종, 오세근, 박찬희가 2011 FIBA(국제농구연맹) 아시아컵, 이정현이 유니버시아드대회 대표팀에 차출된 상태로 오프시즌을 보냈다.
특히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던 3명은 시즌 개막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해산하는 일정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들이라 해도 팀 훈련을 정상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맞이하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실제 정관장은 그토록 기다려왔던 2011-2012시즌을 개막 2연패로 시작했다.
다만, 2경기 모두 2점 차 석패였고, 이상범 감독은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잖아요. 시즌 중 터질 수 있는 불운한 일을 미리 겪은 셈 치려고요. 그동안 쌓인 한은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라며 설욕을 다짐했다.
이상범 감독의 말대로 먼저 맞은 매는 자양분이 됐다. 정관장은 개막 2연패 후 4연승, 단숨에 상위권으로 올라서는 등 점차 이기는 농구에 익숙해졌다. 오세근은 골밑에서 서장훈, 김주성 등 베테랑 못지않은 지배력을 보여줬다. 불과 한 시즌 전 박찬희와 신인상 경쟁을 했던 이정현은 ‘벤치 에이스’로 활약하며 벤치에 깊이를 더해줬다.
정관장은 역대 최소 실점(평균 67.9실점) 기록을 새로 쓰며 정규리그를 지배, ‘동부산성’이라 불렸던 원주 동부(현 DB)의 아성까지 무너뜨렸다. 정규리그 2위에 이어 창단 후 처음으로 오른 챔피언결정전. 정관장은 시리즈 전적 1승 2패에 몰리며 위기를 맞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꽁꽁 숨겨뒀던 드롭존을 펼치며 동부의 허를 찔렀다.
동부 역시 지역방어를 바탕으로 짠물농구를 펼쳤지만, 정관장의 지역방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전면 강압수비로 수비를 시작한 정관장은 백코트 후 곧바로 지역방어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더 많은 체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전이었지만, 젊음으로 무장한 정관장이었기에 띄울 수 있는 승부수였다.
특히 3-2 지역방어에서 외곽, 골밑을 모두 압박하는 중책을 맡았던 양희종이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정관장은 이를 토대로 시리즈 열세를 뒤집었고, 3승 2패 상황서 치른 6차전에서 양희종이 ‘더 샷’까지 터뜨리며 대망의 V1을 달성했다. “KT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한 번(3차전) 졌어요. 그때 희종이를 활용한 드롭존을 꺼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참길 잘했죠(웃음)”라는 게 이상범 감독의 회고다.

‘인삼신기’라 불리며 팀을 지탱해 줬던 마지막 멤버들이 떠난 후 성장통을 겪고 있지만, 걱정하지 말라. ‘양캡틴’의 뒤를 이을 박지훈부터 고졸 신인 박정웅까지. 정관장은 또 한 번의 리빌딩을 통해 영광의 시대를 재현할 퍼즐을 차곡차곡 모았다. 힘겨웠던 리빌딩 기간을 거쳐 왕좌에 올랐듯, 정관장은 머지않아 ‘봄 농구’에 강했던 DNA를 되찾으며 안양 정관장 아레나의 데시벨을 책임질 것이다.
김종규가 드래프트 1순위로 선발됐을 때 유행어를 패러디하며 남긴 말이 있다. “제가 대학 때 우승 많이 해봤거든요. 여기서도 해볼게요. 느낌 아니까!” 이제 정관장이 이렇게 외칠 차례 아닐까. “리빌딩? 우리가 해볼게요.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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