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호] 우리은행이 쓴 드라마, V12의 기적

입력
2024.05.17 08:00
우리은행이 드라마를 썼다. 챔피언결정전이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은행은 철저한 언더독이었다. 당연할 줄 알았던 KB의 우승을 가로막고 리그 2연패에 성공, 통산 12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우리은행의 이번 시즌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음이 분명하다.

*본 기사는 루키 2024년 5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디펜딩 챔피언? 도전자!

2022-2023시즌에 통합 우승을 차지했지만, 우리은행은 전력누수가 적지 않은 상태였다. FA 김정은이 팀을 떠났고, 보상선수 트레이드를 통해 유승희를 영입했지만 유승희는 2022-2023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며 공백기가 길어진 상황이었다. 여기에 박혜진까지 팀 합류가 늦어지면서 우리은행은 정상적이지 못한 전력으로 정규리그 개막을 맞이했다.

설상가상으로 정규리그 개막전에서 유승희가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며 시즌아웃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가용 자원이 부족했던 우리은행에게는 청천벽력 같았던 소식.

실제로 개막 초반 우리은행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경기를 많이 했다. 시즌 개막전 상대였던 BNK는 물론 하나원큐를 상대로도 고전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은행의 저력이 나왔다. 김단비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 농구를 더 단단하게 가져가면서 승수를 쌓기 시작한 것. 유망주였던 박지현의 팀내 비중을 높이고 이적생 이명관을 활용해 경기를 운영했다. 3점 슈터 나윤정의 출전 시간 역시 늘어났다.

전력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차분히 승수를 쌓아가던 우리은행은 1라운드 KB와의 맞대결에서 이명관의 버저비터로 승리를 거두는 대형사고를 친다. 전력 누수가 심한 채로 시즌을 맞이했던 우리은행과 달리, KB는 봄부터 소집한 팀 훈련을 통해 선수단 전원이 건강한 컨디션으로 높은 조직력을 구축한 채 시즌에 돌입한 상태였다.

스스로를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표현 대신 도전자라고 불렀던 우리은행의 저력이 드러난 시즌 초반이었다.

강한 농구는 패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우리은행은 선전을 이어갔다. 홈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간 KB의 압도적인 질주에 리그 선두 자리를 다시 내주고 격차가 벌어졌지만, 우리은행은 우리은행대로 자신들의 페이스로 정규리그를 치렀다. 11월 중순, 박혜진이 마침내 팀에 복귀했지만 이후 주축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부상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페이스를 높이기 어려웠다. 우리은행은 2위 지키기 전략으로 시즌 막바지를 보냈고, 그렇게 플레이오프를 맞이했다.

사실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우리은행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일단 4강 상대부터 삼성생명이었다. 삼성생명은 시즌 막판부터 키아나 스미스가 본격적으로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었고 배혜윤, 이해란 등 만만치 않은 선수들이 즐비한 젊은 강팀이었다.

심지어 우리은행은 과거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생명을 만나 허무하게 업셋을 당한 기억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삼성생명이 우리은행을 무너뜨리고 2020-2021시즌처럼 언더독의 반란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서 업셋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나왔던 것도 그래서다.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삼성생명에 일격을 당한 우리은행. 우려한 대로 업셋 드라마의 희생양이 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질 우리은행이 아니었다. 삼성생명의 1차전 전략에 대한 대응이 2차전부터 곧바로 나왔고, 결국 2, 3, 4차전에서 내리 승리를 챙기며 3연승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강한 압박과 헬프 수비를 활용해 삼성생명의 공격을 완벽하게 봉쇄하고, 외곽 수비에 집중한 삼성생명의 소극적인 페인트존 헬프 수비를 도리어 김단비와 박지현의 노골적인 림 어택으로 무너뜨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챔피언결전전을 앞두고는 대부분의 전문가들, 관계자들이 KB의 낙승을 예상했다. 너무나 당연했다. 우리은행은 정규리그에서 KB를 상대로 2승 4패를 기록했는데, 그 2승은 시즌 초반이었던 1라운드 맞대결에서 거둔 승리와 KB가 박지수 없이 경기를 치른 6라운드 맞대결에서 거둔 승리였다.

KB는 2, 3, 4, 5라운드 맞대결에서 압도적인 수비로 우리은행의 공격을 틀어막았고, 우리은행 역시 KB의 방패를 제대로 뚫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KB는 4강에서 하나원큐를 손쉽게 누르고 긴 휴식을 취하며 챔피언결정전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 누가 봐도 KB의 우세가 분명한 챔피언결정전이었다.

하지만 1차전부터 심상치 않은 드라마가 나왔다. "정규리그와 단기전은 다르다"던 위성우 감독의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됐다.

우리은행은 정규리그에서 박지수 중심의 KB의 변형 지역방어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KB의 변형 지역방어를 깨는 방법은 알지만, 코트에서 실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공격 작업의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1차전부터 우리은행은 김단비를 활용한 움직임과 볼 없는 선수들의 영리한 공간 채우기로 박지수를 괴롭혔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KB 수비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여기에 나윤정의 클러치 3점까지 터지면서 우리은행은 1차전에서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우리은행은 2차전에서 박지수를 앞세운 KB의 페인트존 어택에 아쉬운 역전패를 당했지만, 3차전에서는 16점 차 리드를 뒤집는 저력을 발휘하며 승리를 가져갔다. 지칠대로 지친 주요 선수들의 체력을 세이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반을 버리고 후반에 집중하는 경기 운영을 가져갔고, 이것이 제대로 통했다.

이 과정에서 김단비, 박지현, 최이샘 등의 박지수 상대 육탄전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박지수의 손쉬운 풋백 득점을 틀어막는 우리은행의 수비에 KB는 스스로 무너졌다. KB의 최대 아킬레스건이었던 3점슛 역시 우리은행에겐 효과적인 공략 대상이었다.

3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만들어낸 우리은행. 4차전에서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매경기 계속되던 접전 승부를 4차전에서도 승리로 마무리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김단비가 공격을 효과적으로 풀어갔고, 박혜진의 딥 쓰리도 계속 림을 갈랐다. 결과는 우리은행의 승리.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업셋 드라마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우승을 결정지은 후 위성우 감독은 "8번째 우승이라고 들었는데 처음 우승 때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통합 우승이 아니기로는 처음인 것 같다. 부담감은 제일 덜했다. 밑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좋은 경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챔프전 첫 경기를 하고 해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첫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지만 올해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고 좋지 않나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팀을 떠난 선수도 있고 다친 선수도 있고 운영하기 만만치 않았는데 극복을 선수들이 잘해줬다. 오늘 멤버 교체하기도 힘들었는데 투혼을 발휘한다는 게 이런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투혼을 강조하지만 투혼이 무엇인지 보여준 챔프전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챔프전을 돌아봤다.

우리은행은 무엇이 다른가

2012년 위성우 감독 부임후 12년 동안 벌써 8번째 우승. 이 정도면 우리은행은 너무나 당연히 한 시대를 지배한 왕조였다고 평가받을만 하다.

한때 리그 최하위권을 전전하던 우리은행이 왕조로 변신하고, 올 시즌처럼 전력누수가 큰 상황에서도 우승을 일궈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은행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우리은행이 다른 팀과 가장 차별화되는 것은 역시 강한 체력과 압박이다. 위성우 감독은 평소 '강한 훈련이 강한 선수와 팀을 만든다'는 철학을 가진 지도자다. 과거에 비해 강도와 양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은행은 지금도 6개 구단 중 훈련 분위기가 가장 터프하고 철저한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내는 '코트 밖'의 시간은 곧 경기에서 힘을 발휘한다. 많은 훈련과 준비를 통해 단련된 우리은행 선수들은 40분 내내 강한 압박와 에너지를 통해 상대 공격을 틀어막는다. 공격에서는 준비된 움직임을 완벽하게 실행하며 상대 수비를 무너뜨린다.

KB와의 챔프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결국 이 같은 부분 때문이었다. KB가 박지수를 활용한 변형 지역방어를 쓸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예상했던 부분이다. 문제는 실제로 코트에서 선수들이 이걸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느냐였다. 공격 작업을 전개하는 약 14~18초의 시간 동안 볼이 없는 선수들도 빈 공간을 찾아내며 쉴새없이 움직여야 하고 순간적으로 발생한 찬스를 성공시켜야 하기에,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KB의 변형 지역방어를 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걸 우리은행은 해냈다. 김단비, 박혜진 같은 노련하고 기능이 좋은 선수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 도움이 됐겠지만, 농구는 코트 위의 1-2명이 경기를 잘 풀어간다고 해서 모든 게 잘 되는 게임이 아니다. 특히 챔피언결정전 레벨의 게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결국 우리은행의 이번 시즌 우승은 많은 훈련과 준비, 선수들의 코트 위 실행 능력, 코칭스태프의 적절한 승부수가 합작해낸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BOX: 드라마 같은 우승과 충격적 FA 시장, 우리은행의 미래는?

드라마틱한 우승의 기쁨도 잠시, 우리은행은 곧바로 열린 FA 시장에서 내부 FA들이 팀을 대거 떠나고 말았다. 박지현은 해외리그 도전을 선언하며 계약을 임의해지했고, 박혜진은 BNK로, 최이샘은 신한은행으로 이적했다. 쏠쏠한 활약을 펼치던 나윤정도 KB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은행은 박혜미와 심성영을 영입하고 이다연과 한엄지를 보상 선수로 지명해 일단 공백을 메운 상태 하지만 팀을 떠난 선수들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우리은행의 전력은 크게 약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위성우 감독은 루키와의 통화에서 "팀에 온지 10년이 넘었다. 어떤 팀이든 사이클이 있다. 아쉽지만 올 게 왔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일각에서는 뜻하지 않은 리빌딩 상황을 맞게 된 우리은행이 다음 시즌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위성우 감독이 이끄는 우리은행의 저력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은행은 새롭게 찾아온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까. 우리은행의 2024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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