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 김민혁(30)은 시범경기를 3~4경기 정도 치른 시점에서 “4번 타자로 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유한준 타격코치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4번 타자’는 팀내 최고 타자들이 서는 상징적인 자리다. 정확성과 장타력, 중요할 때 해결하는 클러치 능력까지 겸비한 타자들이 주로 맡는다.
2014년 KT 창단 멤버로 입단한 외야수 김민혁은 프로 12년 차지만 그런 유형의 타자는 아니다. 컨택트 능력이 좋은 김민혁은 지난해 타율 0.353(351타수124안타) 34타점 47득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타격은 꾸준한 오름세지만, 통산 홈런은 10개 뿐이다.
2025년 KBO리그 개막 이후, 김민혁은 실제로 KT 4번 타자로 나서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시범경기에 4번 타자로 계속 들어가면서부터 예감했다”는 김민혁은 “그래도 ‘개막하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코치님이 진지하게 계속 얘기해서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강철 KT 감독은 이번 시즌 타선 강화를 위해 팀 최고 강타자인 강백호와 멜 로하스 주니어를 1·2번 타순에 전진 배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동시에 교타자 유형인 허경민과 김민혁을 3·4번에 넣어 ‘상식’과 다른 선택을 했다. 특히 김민혁을 4번 타순에 넣는 것은 ‘파격’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4번 타자 김민혁이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김민혁은 지난 25일 두산과 홈 경기에서 4타수2안타(1득점)로 활약했다. 강백호-로하스-허경민 타순이 폭발하는 가운데 김민혁의 방망이까지 터지고 있다. 김민혁은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4번 타자로 나선 지난 22일 한화와 개막전에서 멀티히트(1타점)를 기록하는 등 개막 3경기에서 모두 안타를 쳐냈다. 3경기 타율은 0.417(12타수5안타)다.
김민혁은 “4번 타자라는 타이틀이 주는 압박감은 솔직히 조금 크다. 감독님이 짠 타순을 주변에서 파격적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서 저는 일반적인 4번 타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맞는 배팅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매 타석에 선다”고 말했다.
그래도 김민혁은 그 부담감을 잘 이겨내고 있다. 출발이 아주 좋다. 개막전 첫 타석에서 친 안타가 적시타였다. 1회말 2사 3루에서 시즌 첫 안타를 쳐 3루 주자 강백호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2-1로 앞선 5회 1사 1·2루에서는 아쉽게 2루수 앞 병살타를 쳤지만 2안타 경기를 했다.
김민혁은 “개막전에서 안타를 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개막전 첫 안타 기쁨보다 병살타의 아쉬움이 더 짙게 남았다. 김민혁은 “그때 다른 4번 타자였다면 확실한 자기 스윙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투스트라이크 이후 삼진을 당하지 않고자 맞히려는 습관이 나와서 맥없는 땅볼을 쳤다”고 복기했다.
이 감독은 “왼손투수를 상대로도 잘 쳤다”며 좌우 투수를 가리지 않고 김민혁에게 4번 타자로 기회를 줄 것임을 밝혔다. 이에 김민혁은 “더 잘해야 하지 않겠나. 좌투수라고 더 어려운 부분은 없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민혁은 이어 “(문)상철이 형이 ‘어느 타순이든 자기 야구를 한다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해줬다”며 “4번 타자라는 생각보다 출전하는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매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고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생각이 많은 편인 김민혁은 “4번 타자들은 찬스에서 못 치더라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마인드를 배워야겠다”며 자신의 숙제도 이야기했다.
‘4번 타자 김민혁’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어려운 자리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김민혁은 “네번째 타자라는 상징적인 자리에서 잘 하면 임팩트가 크지 않겠나”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