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콘은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아주 작은 크기다. 오른쪽 9개의 버튼 중 맨 윗줄 왼쪽 버튼을 짧게 눌러봤다. 웬 남성의 목소리가 “포심”이라고 말한다. 같은 버튼을 길게 누르니 “몸쪽 높게”라고 하는, 같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쪽 높은 코스를 부르고 싶었는데···. 정정해야겠다. 리모콘 왼쪽에 있는 동그란 버튼을 누르니 같은 남성이 “취소”라고 한다. 그리고 맨오른쪽 아래 버튼을 길게 누르니 “바깥쪽 낮게”라고 ‘정정’이 된다.
지난 15일 10개 구단에 배포돼 16일부터 그라운드에 등장한 피치컴은 그야말로 약식으로 소통하는 기계다. 사인 훔치는 행위를 막자는 것이 원래 취지지만 경기 중 투수와 포수가 서로 얼굴을 보고 수신호를 보내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사인을 주고받을 수 있어 경기 시간 단축 효과도 있다.
사진으로는 봤지만 피치컴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작동시키며 어떤 소리가 나는 걸까. 기자가 직접 누르고 들어보았다. 경기 중 소란스러운 야외 그라운드 환경을 직접 체험해볼 수는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 조작하고 어느 정도의 음량으로 들리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피치컴 세트에는 송신기 2개와 수신기, 충전기, 전파수신기가 들어있다. 송신기는 여자 손에도 쏙 들어오는 아주 작은 크기다. 오른쪽의 9개 버튼으로 구종과 코스를 표시한다. 짧게 누르면 구종, 길게 누르면 코스다. 먼저 짧게 눌러 구종을 선택한 뒤 두번째로 길게 눌러 코스 사인을 보낸다.
구종은 포심,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싱커, 커터까지 6개가 설정돼 있다. 나머지 3개 버튼은 견제, 홀드, 피치아웃이다. 각 구단에 배포하기 전 KBO가 세팅해놓은 버전이다. 각 구단별로 필요 없는 구종을 빼고 필요한 구종을 넣어 새로 편집할 수 있다.
9개 버튼을 각각 길게 누르면 코스 표시다. 그 중 왼쪽 버튼 3개를 차례로 눌러봤다. 맨 위는 “몸쪽 높게”, 그 아래는 “몸쪽 가운데”, 맨 아래는 “몸쪽 낮게”로 사인을 보내는 식이다. 구단별로 잘 안 쓰는 구종이 있다면 그 버튼에는 포수의 말을 입력해 설정할 수도 있다. 투수가 던진 뒤에 “나이스 피칭” “좋았어” 등 포수가 투수 귀에 대고 반응을 직접 전달하고 파이팅 내는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코스는 버튼 위치로 연상이 가능해 쉽게 숙지할 수 있는데 버튼별 구종 위치를 외우려면 조금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체격도 손도 큰 선수들 입장에서는 경기 중 정신없을 때 버튼이 꽤 작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수로 잘못 눌러도 취소 버튼이 있으니 걱정은 없다. 지난 17일 선발 투수 양현종이 한 번 해보자고 해 급하게 피치컴 작동법을 외우고 나간 KIA 포수 한준수는 “사인미스는 한 번도 없었다. 잘못 누를 때마다 취소를 누를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신기는 10개가 들어있다. 그 중 7개는 한국어-영어 버전, 나머지 3개는 영어-스페인어 버전이다. 외국인 선수들을 위한 것으로 경기 전 송신기의 간단한 조작을 통해 언어 설정을 전환할 수 있다. 설정법이 까다롭지만, 세 가지 외 다른 언어도 구단이 직접 추가할 수 있다.
투수와 야수들은 귀 윗쪽의 모자 안쪽 접힌 부분에 수신기를 넣고 경기한다. 실제 들어보니 바로 귀에 대고 말하듯 들린다. 다만 모자 안에 납작한 수신기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거슬린다.
포수의 수신기만 모양이 다르다. 이어폰이 달려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헬멧 안쪽에 끼워 착용한다. 선수마다 적응도는 다르다.
KIA 포수 김태군은 20일 한화전에서 파울플라이를 잡으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수신기가 빠져 다시 찾느라 잠깐 경기를 중단하기도 했다. 김태군은 “포수 마스크를 쓰면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수신기를 착용할 때 불편함이 있다. 오늘 몇 번 빠지기도 해서 포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아직 어떻게 써야할 지 정립이 안 돼 있고 버튼이 제대로 숙지가 안 돼 있어 지금 당장은 쓰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같은 팀 포수 한준수도 송신기 작동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수신기에 대해서는 “한쪽만 꽂으니까 안 꽂은 쪽에 관중 소리 등이 굉장히 크게 들려서 오히려 수신기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했다. 두산 투수 곽빈도 “맨처음에는 관중 소리와 겹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수신기의 볼륨을 조절할 수 있는데 최대치로 해봤더니 너무 크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선수들의 청력은 소중하므로, 소음이 큰 경기 중이라 하더라도 위험할 수 있으니 잘 조절해야 할 것 같다.
피치컴을 사용한 투수 대부분이 수신기의 음성을 듣느라 전과 달리 포수를 쳐다보지 않는다. 삭막한 느낌도 든다. 반응도 각기 다르다. 투구 템포가 확실히 빨라지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삼성전에서 수신기를 착용하고 던진 양현종은 거의 땅을 보며 음성을 듣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양현종은 “템포가 엄청 빨라진다. 사인 들리는대로 던지다보니 가속이 붙는 것처럼 내가 너무 빨리 던지는데 그게 좀 어색한 느낌이었다. 내 템포에 나 스스로가 적응을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양현종은 사인을 직접 내지 않는 편이지만 미리 적응하기 위해 다음 경기에서는 송신기도 직접 착용해볼까 생각 중이다.
곽빈은 “나는 템포를 빠르게 하고 싶은 투수다. 타자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 내가 더 유리하게 들어갈 수 있는 느낌이었다”고 투구 템포가 빨라지는 것을 반겼다.
수신기는 투·포수 외에 야수 3명까지 착용할 수 있다. 보통 센터라인에 내야수 둘, 외야수 한 명이 착용한다. 투수와 포수 간의 사인을 잘 읽어야 하는 유격수에게 효용이 크다.
KIA 유격수 박찬호는 “수비할 때 힘들게 포수 사인을 보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다. 한번 써 보니 수신기를 착용할 때 조금 불편하긴 한데 그거 말고는 딱히 안 좋은 점은 없었다. 기계 오류만 나지 않는다면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더그아웃에서 가장 멀리 나가 있는 외야수 중에서는 간혹 안 들리는 사례가 있는 듯 보인다. KIA 외야수 최원준은 음성이 자꾸 끊겨 들리는 증상을 겪었다. 관중석 소음 때문이 아닌 전파 수신 문제다. 피치컴을 사용한 대부분 선수단이 전파수신기가 들어있는 피치컴 세트를 경기 중에는 더그아웃에 둬 최대한 선수들과 가깝게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