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기자] 농담이 아니었다. 조용히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잊지 않았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투수 류현진(37)과 고참 선수들이 겨울 바다 입수로 ‘5강 실패 공약’을 실천했다.
류현진을 필두로 투수 장시환(37), 이태양(34), 장민재(34), 포수 이재원(36), 최재훈(35), 내야수 안치홍(34), 외야수 채은성(34) 등 8명의 한화 고참 선수들이 서해에 모여 겨울 바다에 입수했다. 11일 류현진이 자신의 SNS에 입수 영상을 올려 ‘인증’했다.
12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한겨울이지만 한화 고참 선수들은 모두 얇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바다에 몸을 담갔다. 이태양은 아예 상의를 탈의했다. 선수들은 ‘하나 둘 셋’을 외친 뒤에 동시에 머리를 차디찬 바닷물에 집어넣었다.
짧은 냉수 마찰이었지만 흠뻑 젖은 선수들은 온몸에 한기가 돌았는지 몸을 감싸거나 발을 동동 굴렀다. 몇 초 안 되는 영상이었지만 한화 고참 선수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류현진은 “팬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러 겨울 바다 다녀왔습니다. 내년에 제대로 더 잘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같은 한화 고참들의 겨울 바다 입수는 시즌 전 공약이 발단이었다. 지난 3월22일 KBO 미디어데이에 한화 대표 선수로 참석한 주장 채은성은 “5강에 못 들면 고참들이 12월에 태안 앞바다에 가서 입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보통 시즌 전 공약으로 대부분 팀들이 우승이나 5강을 이야기하지만 ‘5강 실패시’ 공약을 내걸어 화제가 됐다. 류현진이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로 5강에는 어떻게든 들어가겠다는 한화 고참들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공약이었다.
개막 10경기 8승2패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스타트를 끊은 한화는 그러나 이후 거짓말 같이 추락했다. 5월말 감독이 바뀌었고, 8월 여름에 상승세를 타며 5강 희망을 높였지만 거기까지였다. 9월부터 힘이 빠지면서 결국 8위(66승76패2무 승률 .465)로 마무리했고, 6년 연속 가을야구가 좌절됐다.
아쉬운 시즌이 끝났지만 한화 고참들은 시즌 전 공약을 잊지 않았다. 12월 중순이 한겨울에 서해 바다를 찾아 진짜로 입수했다. 구단에도 따로 알리지 않고 선수들끼리 조용히 움직여 공약을 이행했다. 미처 몰랐던 구단이나 후배 선수들도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며 놀랍다는 반응이다.
사실 가벼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미디어데이 공약은 꼭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벌칙 수행으로 보여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화 고참들은 공약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내년 시즌에 대한 비장한 의지를 보여줬다.
한화는 시즌을 마친 뒤 3일만 쉬고 대전에서 훈련을 이어갔다. 일본 미야자키 마무리캠프까지 두 달 가까이 강도 높은 훈련을 펼쳤다. 이례적으로 채은성을 비롯해 고참 선수들끼리 마무리캠프에 가서 솔선수범했다. 김경문 감독도 “우리 고참들이 열심히 해줘 캠프를 좋은 분위기로 치를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한화는 내년에 대전 새 야구장 개장에 맞춰 BI와 유니폼도 바꾸고 완전히 새출발한다. 외부 FA도 2명(엄상백·심우준)이나 영입하며 전력 보강을 이뤘다. 올해 28경기(158⅓이닝) 10승8패 평균자책점 3.87 탈삼진 135개로 팀 내 유일한 규정이닝 투수로 분전한 류현진은 지난 3일 ‘2024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에서 “내년에 꼭 가을야구를 하고 싶다. 상백이, 우준이가 와서 자리를 잡아줄 거라고 생각한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문동주, 김서현, 문현빈, 황영묵 등 젊은 선수들도 성장하고 있는 한화이지만 5강 이상을 바라보기 위해선 고참 선수들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겨울 바다 입수로 고참들이 보여준 비장함이 내년 한화 대도약을 위한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waw@osen.co.kr